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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첨자발표] <랑페르> 베스트리뷰 공개모집!


<랑페르> 상영이 끝났기에 베스트리뷰 당첨자를 발표합니다!
그동안 좋은 리뷰를 보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우수리뷰로 소개된 3분에게는 소정의 선물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3분중 베스트리뷰로 뽑히신 분에게는 1년동안 진행될
영화사 백두대간의 모든 시사회 초대권을 드립니다
과연! 최종 결정된 베스트 리뷰 당첨자는 누구일까요?

그 주인공은 이인미님입니다.

이인미님이 보내주신 글은 씨네21 독자게시란에도 소개되었던 글입니다만,
지옥을 "불통"의 공간으로 재해석한 관점이 무척 신선할 뿐더러,
문장의 안정성, 전체적인 글의 통일성이 뛰어나 베스트 리뷰로 최종결정되었습니다!
이인미 님에게는 1년동안 진행될 영화사 백두대간의 모든 영화 시사회에
참석할 수 있는 초대권을 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

ps 그동안 <랑페르>를 오래~ 사랑해주신 관객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_____________^


다음은 베스트리뷰로 뽑힌 이인미님의 <랑페르> 베스트리뷰입니다


랑페르=지옥, 불통(不通)의 공간
<랑페르> 영화

- 이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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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랑페르'의 포스터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뻐꾸기 새끼가 둥지에서 떨어졌다. 한 남자가 그놈을, 다칠세라 조심조심 들어올려 그놈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주고 둥지에 올려놓아준다. 그런데 사실인즉, 그 뻐꾸기 새끼는 제일 먼저 알을 깨고 나와 둥지의 다른 알들(남의 새의 알들--영화에서는 때까치, 멧새, 종달새 중의 한 종인 듯)을 바깥으로 밀어 떨어뜨리려다가 균형을 잃어 자기가 떨어진 거였다.

남자는 그 내막을 알 리 없고, 또 그 내막을 알려 하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그 남자는 그놈의 생을 통째로 오해한 것이다. 남자는 어리디 어린, 아직 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작은 새를 가여워한 것일 뿐, 그놈의 ‘진실’은 모른다. 그 남자가 둥지 곁을 떠나자마자, 아까 그놈 그 뻐꾸기 새끼가 또 떨어뜨린 알이 돌에 부딪혀 '퍽' 하고 터진다.

<랑페르>의 첫 장면이다. 뻐꾸기 새끼의 소행을 이미 목도한 관객으로서는 그 남자의 선행(!)에 대해 간단하게 “음, 잘했군, 잘했어. 가여운 새를 구했잖아”라고 말할 수가 없다. 좀더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 속을 오갈 수밖에 없다. 삶에 대한 강한 욕망, 삶의 가치에 대해 가타부타 말할 수 없게 된다.

어느 날, 소피, 셀린느, 안느의 아버지가 벌거벗은 소년과 한 방에 있다. 예고없이 들이닥친 셀린느와 셀린느의 어머니(남자의 아내)가 바로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소년이 왜 성인남자 앞에서 벌거벗고 있는지, 방문을 열기까지 그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두 모녀는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다. 이후 셀린느의 어머니는 남편을 수치스러워하며, 남편을 내쫓는다. 남편이 찾아와 집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아이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행패를 부리자 온 몸으로 막다가 남편의 폭행에 상처를 입고 쓰러진다. 남편은 아이들과 얘기하고 싶어하지만 아이들도 아버지를 피한다. 그는 고통스러워하다가 창밖으로 뛰어내린다.

그런데 벌거벗은 소년과 성인남자가 한 방에 있는 그 장면은 (뻐꾸기 새끼 추락사건처럼) 그 이전 장면들, 그 장면의 내막을 필요로 한다. 여러 해가 지난 뒤 그 소년(청년이 되었다)이 스스로 밝힌 내막은 이러하다. 소년은 동성애자로서, 셀린느의 아버지를 짝사랑하던 끝에 벌거벗고 그의 앞에 섰던 것이다. 어떻게 사랑을 고백해야 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뻐꾸기 새끼의 ‘진실’이 오해되었듯, 셀린느 아버지의 ‘진실’도 오해되었던 게 틀림없다. 셀린느 아버지는 그 오해를 풀고 싶었을 것이다. 왜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아내는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아이들도 문을 꽁꽁 걸어잠그고 아버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행패를 부리다가 절망하여 자살해버린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흐른 뒤, 셀린느가 제일 먼저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된다. 동성애자 소년이 그 일 발생 당시에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성인이 되어 동성 파트너를 통해 안정을 되찾게 되자 비로소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녀를 찾아왔던 것이다. 셀린느는 언니 소피, 동생 안느에게 그의 말을 전달한다. 이제 세 자매는 어머니를 찾아간다. 어머니는 목에 깁스를 한 채 홀로 지내고 있다. 그녀는 딸들이 찾아온 게 흐뭇해서 종이에 이렇게 쓴다(그녀는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나를 찾아온 걸 보니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는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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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해였어요." "난 후회하지 않아." 영화 속 어머니는 소통(疏通)이 아니라 불통(不通)을 선택한다. (사진은 영화 '랑페르'의 한 장면)
딸들은 아버지에 관련된 일에 대해 “오해였어요”라고 어머니에게 말해준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응답한다. “난 후회하지 않아.” 그녀는 깁스한 목을 옆으로 돌리지 못하듯 한 번 하나의 관점으로 규정해둔 사건에 대해서 다른 면으로 볼 생각을 못한다. 오해를 풀지 않겠다고 작정하였다. 소통(疏通)이 아니라 불통(不通)을 선택한 것이다.

오해하기, 소통하지 않기, 말 듣지 않기, 말하지 않기. 오해한다는 것, 그건 그 어머니만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녀의 첫딸, 소피는 외도하는 남편의 진심이 무언지 모른다. 남편도 자신의 심정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워한다. 외도를 하면서도 소피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집에서 내쫓기고 외도상대여성에게도 버림받자 그는 집으로 돌아와 현관에 기대어 앉아 고통스러워한다. 부인과 의사소통해보려 하기보다는 문을 쾅쾅 두들기고 소리를 벅벅 질러대기만 한다.

둘째딸 셀린느는 타인과 대화하는 게 무척 어렵다. 기차의 역무원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기차여행을 주기적으로 하는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나 그녀는 줄기차게 잠만 잘 뿐이다. “불면증인데, 기차에 타기만 하면 잠이 와요”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가끔 주위 사람들이 그녀에게 말을 건네거나 하면 늘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웃지도 않고, 표정이 별로 다양하지 않다.

셋째딸 안느는 자신의 친구 아버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던 중 임신하게 되었는데, 마침내는 그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남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굳게 믿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제 우리 관계는 끝이라고 아무리 여러 번 얘기를 해도 수긍하지 못한다. 그 남자 또한 안느를 피하려고만 할 뿐 그녀에게 자신의 심정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그 남자가 사고로 죽어버린다.

세 명의 딸들은 자기 아버지의 일에 대해서는 비록 이해하게 되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떨까? 자기 남편에 대한 자신의 처사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어머니의 태도를 딸들은 넘어설 수 있을까?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수정해야 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기꺼이 수정할까? 상대방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무시할까? 상대방에 대한 새로운 정보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건 혹, 이해하지 않겠다는, 오해를 지속하겠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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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대방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나타났는데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일, 즉 불통하겠다고 결정하는 일 자체가 곧 지옥을 선택하는 것이고, 그 불통의 공간이 곧 지옥이다.
<랑페르>의 영화평들은, <랑페르>가 평화로운 세계 이면에 감추어진 ‘지옥(사랑은 달콤하나 잔인하기도 하다!)’을 그리고 있다고 평한다. 일리있다고 생각하면서, 한편, 나는 좀 다르게 보고 싶다.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나타났는데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일, 즉 불통하겠다고 결정하는 일 자체가 곧 지옥을 선택하는 것이고, 그 불통의 공간이 곧 지옥이라고…. <랑페르>는 그런 지옥을 보여주고 있다고….

<랑페르>는 불란서 말로 ‘지옥’이다. 이런 예쁜 발음의 단어가 ‘지옥’이라니(반대로, ‘jiok’을 외국인들은 예쁜 발음으로 들을지도 모른다). 나는 <랑페르>를 보며, 내내 불편하게 뒤척였다. 불통의 공간, 지옥을 보는 게 괴로웠기 때문이다. 자매, 모녀, 부부, 부녀…. 모두가 불통의 공간에 놓여있는 것 같았다.

장 폴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했다는데(무슨 책에서 그랬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맥락을 잘 비교해봐야 하겠지만 사르트르의 지옥과 영화 <랑페르>의 지옥이, 의미가 얼추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해보았다. 즉, 개체와 개체 간에 소통이 일어나지 못할 때,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또는 이해하지 않으려 해서 생겨나는 사람들 사이의 불통의 공간이 곧 지옥이라는….

<랑페르>가 불통의 공간을 지옥으로 형상화했다고 본다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우리 사는 세상이 대체로 불통의 공간인 양 보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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